[기자의 눈] 미국의 안전지대는 어디인가
얼마 전 한국의 지인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뜸 미국이 안전하냐고 묻는 것이었다. 연일 총기 사건이 터지고, 아시아계 대상 증오범죄가 벌어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있다고 했다. 미국에 사는 입장에서 이런 질문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마음 편히 와라”고 말하기엔 일상 속에 불편한 진실들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기회의 땅이라며 미국으로 유학, 이민을 떠난 사람들을 부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미국 유학을 떠나면 ‘부잣집 자제’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따라붙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에 대한 인식은 많이 바뀌었다. 미국의 빈부격차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레이건 집권 이래 30년 이상 가혹한 신자유주의의 수탈을 통해 부는 극단적으로 최상층에 쏠렸다. 2020년 미 전체 가구 순 자산에서 상위 10퍼센트가 차지한 비중은 무려 70%를 넘어선다. 하위 50%는 1.7%에 불과하다. 서류 미비 이민자,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고 올린 바벨탑과도 같다. 여기에 최근 계속 거론되는 총기, 마약, 인종차별 문제는 여전히 진행형인 암적 요소다. 지난해 텍사스주 유밸디의 한 초등학교에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 등 21명이 총기난사 사건으로 숨졌다. 얼마 전엔 6살 꼬마가 학교에서 선생님의 훈계가 듣기 싫다며 선생님을 향해 총을 쏜 일도 있었다. LA한인타운에서도 건물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 아무 이유 없이 총에 맞아 숨지는 일이 벌어졌다. 폭죽 소리가 총기 소리는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로 총기 사고는 미국 사회 깊숙한 곳에 암 덩어리처럼 존재해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어느새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 바이든 행정부는 끊임없이 총기 규제를 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지키지 못했다. 지난 5월 유밸디 총기난사 사건 이후 바이든 대통령은 “내가 취할 수 있는 모든 행정적 조치를 하겠다”면서도 “총기 소지를 불법화할 수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미 의회에서 총기 규제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10년 넘도록 단 한 건도 통과하지 못했다. 아무 쓸모 없는 ‘행정명령’만 계속 내릴 뿐, 법원에서 계속 제동이 걸리는 이 상황은 바이든 행정부의 실패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두려움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증오를 낳으며, 증오는 고통을 낳는다”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부터 증폭된 ‘아시아계 증오범죄’는 그렇게 급증했고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뉴욕 지하철에서 흑인 남성으로부터 아시아계 남성이 잔인하게 폭행을 당하고 있는데도 마치 ‘좋은 구경거리’라도 되는 마냥 동영상을 찍거나 환호성을 지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다”며 본질을 피해갈 것이 아니라 우리도 언제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우리 안의 두려움과 분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힘, 이것이 혐오의 메커니즘에 맞서는 길이다. 가장 치명적인 마약이라 불리는 펜타닐은 미국을 집어삼킬 모양새다. 미국에선 최근 6년 동안 펜타닐 과다복용으로만 21만 명이 사망했다. 자살과 코로나19로 인한 사망자보다 펜타닐 중독에 따른 사망자가 더 많음을 보여주는 통계다. 펜타닐이 급격히 확산한 것은 마약성 진통제라는 이유로 약물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허술한 감시망을 틈타 퍼져버린 것이다. 사실 지금은 많은 주에서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는 마리화나도 한국에선 여전히 마약으로 분류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후보 시절 마리화나 합법화 공약을 내걸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LA 등에서 마약 중독자들의 끔찍한 참상이 연일 보도되고 있음에도 정계의 마리화나 합법화는 계속 추진되고 있다.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라는 자만에 어깨에 힘만 줄 것이 아니라, 현재의 혼란부터 꼼꼼히 정리해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행정부는 물론, 미 국민 모두의 관심 속에 이뤄져야 한다. 홍희정 / JTBC특파원기자의 눈 미국 안전지대 아시아계 증오범죄 총기 마약 총기난사 사건